이형락 선생 약력
이형락 선생 약력(활동시 가명- 이 권)
(1931. 7. 19. - 1985. 6. 24.)

1931년 7월 19일 경북 예천에서 한의원을 하시던 부친 이종황님과 모친 김노익님 사이의 4남3녀 중 3남(다섯째)으로 태어나셨습니다.
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시던 대쪽 같은 성품의 부친과 자상한 모친의 보살핌 속에 유복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내셨습니다.
약을 잘못 처방해서 사람이 상했다는 항의에 전 가산을 털어 보상한 후 부친이 세상을 뜨자 당시 교사생활을 하던 맏형(이대락)의 보살핌 아래에서 
성장기를 보내게 됩니다.
해방 후 맏형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, 15세 나이에 홀홀단신 상경하였습니다. 
서울 성도중학교에 입학하여 신문배달 등을 하며 학비를 벌어 고학하시면서 민주학생연맹 활동을 하고, 정치대학(건국대 전신)청강생으로 공부하던 중
1950년 3월 1일 서울시경에 체포되어 학업을 중단하게 됩니다.
서울에서 여학생연맹 위원장 출신의 한기명님을 만나 1956년 결혼하여 슬하에 다섯 딸을 두셨습니다.
1959년 대한노총의 김말룡과 함께 전국노동조합협의회(전국노협) 결성에 관여하였고, 이 시기에 이일재, 이재문 선생 등을 만나게 됩니다.
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나자 대구로 와서 경북노동조합협의회 통계부장으로 활동하며 나경일, 김병권 선생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. 
이 땅의 가난과 모순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각성하고, 그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를 변혁시켜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, 노동자 중심의 전위정당을
만들기 위한 많은 고민과 노력들을 기울였습니다. 
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시기에는 초등학생이던 큰 딸을 데리고 몇 달간 피신을 다녀서 검거를 피하기도 했습니다.
아이들과 가족들에겐 늘 ‘사람도리’에 대해 말씀했으며, 자상하고 인간애가 깊어, 동냥 온 거지나 넝마주이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으며, 모든 인간은 
평등하며 존중되어야 한다고 자식들에게 온몸으로, 삶으로 가르쳤습니다.
 
1968년 7월 30일 통혁당 관련자들의 검거로 피할 겨를 없이 피검 되셨습니다.
한 달여에 걸친 모진 고문과 매질, 협박으로 ‘남조선해방전략당’이 만들어지고, 그 당의 지역조직책으로 만들어져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2심에서 10년형 
선고받고 10년간 대전교도소에서 영어의 생활하셨습니다.
1978년 9월 6일 만기 출소하였으나, 
보안관찰 대상자로 지정되어 돌아가실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였으며 80년 5월에 한 번, 83년 대구미문화원 폭파사건 때 또 한 번, 
예비검속으로 안기부에 잡혀가서 며칠씩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. 
 
모진 고문과 매질의 후유증과 트라우마, 제대로 교육도 못시키고, 불구가 되기도 한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 등으로 결국 1985년 6월24일 쉰다섯이라는 
젊은 나이에 스스로 유명을 달리하시게 되었습니다. 
현재는 마석모란공원에 아내이자 평생동지인 한기명선생과 함께 안장되어 계십니다.
부모님결혼.jpg
1931.7.19  경북 예천 출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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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46           15세 나이로 서울로 상경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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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50.3.1     민주학생연맹 활동 중 체포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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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56            여학생연맹 위원장 출신 한기명과 결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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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59            전국노동조합협의회(전국노협) 결성 관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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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68. 7.30   '남조선해방전략당' 사건으로 피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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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78.9.6.     대전교도소 만기 출소이후 보호관찰 대상자로 지정 
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공안사건 때마다 안기부에서 조사 받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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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85. 6.24   쉰 다섯이란 젊은 나이에 소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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* 현재는 경기도 마석모란공원에 안장
* 슬하에 다섯 딸을 둠